보라색 문을 품은 노란색 상자 : 이지연 개인전 


Lee Jiyeon 이지연


                                                                                                                                       "너머의 너머"





 공간: 空 빌 공   間 사이 간 



 공간은 한자로 '빈 곳' 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곳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위로 받고 싶을 때마다 찾게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특별한 장소는 아니지만 가만히 머물다 보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어느새 잔잔해지는 걸 느낍니다. 

이처럼 공간은 사람을 끌어당기고, 머물게 하고, 느끼고 상상하게 합니다.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던 이지연 작가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서 공간 너머의 또 다른 공간을 상상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소파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거꾸로 걸어 다니기도 하고, 무서워서 혼자 올라가지 못하는 2층의 방과 계단 아래에는 어떤 공간이 펼쳐질까 상상했습니다. 

눈으로 새로운 공간을 그리는 건 어린 소녀에게 가장 재미난 놀이였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저서 <행복의 건축>에 보면 집을 '식견을 갖춘 증인' 으로 성장했다고 표현합니다. 

집은 마당에서 치른 막내 이모의 결혼식과 어린 오빠가 계단 손잡이를 미끄럼틀 삼아 내려오다 할머니에게 야단 맞던 순간을 지켜보았으며, 

이른 새벽 마당을 쓸고 락스를 풀어 현관을 청소하는 부지런한 외할머니의 일상을 함께 했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공유한 집과 공간에 대한 기억, 그로부터 비롯된 상상의 놀이는 작가에게 잊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은 순수한 마음과 호기심으로 남아 

20년이 넘게 작업으로 이어가는 중입니다. 

테이프를 연필 삼아 그림을 그리는 월페인팅(테이프드로잉)을 통해 작가는 상상과 회상, 끊임없는 연상의 과정을 반복하며 끝없는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작업은 공간 너머의 공간을 상상하던 어린 시절의 놀이이자 작가의 이상향과도 같은 보라색 문 너머의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엘리펀트프리지에 만들어진 끝없는 풍경 속 문을 열고 들어가며 '너머의 너머'를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 만의 보라색 문을 찾을 수도, 혹은 이미 보라색 문 안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독립기획자 & 엘리펀트프리지 대표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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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노트 (Artist's Note)



[보라색 문을 품은 노란색 상자]



 막다른 길을 향해 가다 오른쪽 골목 끝에 노란색 간판의 유리문을 만났다. 새하얀 공간 안에 보이는 가느다란 선의 사각형 문이 또 다른 곳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처럼 열려보인다.

방금 들어온 이 상자 속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비밀의 문을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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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도화지처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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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를 모를 호기심상자처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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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호기심상자 속에 길을 나선다_



 문틈 사이로 또 다른 문을 본다. 문을 지나 또 문을 찾는다. 얇게 접힌 공간들로 보이는 틈에서 여러 갈래의 길을 본 듯하다. 계단과 문이 반복되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던 시선을 돌려 가까이를 둘러본다. 계단을 따라 오가며 심(心). 심(審)한 시간을 여기, 여기저기 뚫려있는 문 사이-사이(공간)들에서는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공간을 상상하고 그 안에서 길을 만들며 놀던 시간을 노란 상자에 담으며 신이 난다. 선을 따라 걷고 선 속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있다 움직인다.  향해 가는 다음이 지금인 것처럼 보라색 꿈을 꾼다.




                                                                                                            2023 엘리펀트프리지를 만난 후 작가 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