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감싸는 생명의 기운
김보라는 작업을 시작한 1990년대 초반부터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해왔다. 일반적으로 바느질은 노동집약적이고 여성적인 작업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손바느질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미싱이라고 부르는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한다. 재봉에 매료된 이유는 바로 속도감 때문이다. 페달을 밟으면 재봉틀은 쉬지 않고 구멍을 뚫으며 박음질한다. 처음에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리는 것 같았고 숨길, 바람길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
작업 과정을 지켜보면 재봉틀로 박음질한다기보다 '재봉틀을 타고 달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방향을 이끌고 조절하지만 때로는 재봉틀이 나아가는 대로 몸을 내맡기기도 한다. 그에게 박음질은 가장 적절한 표현 도구이다. 그림이 뭔가 부족하고 아쉬울 때 박음질이 자신의 작업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재봉틀이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의 밀도를 높이는 재봉틀과의 협업이다.
손바느질과 재봉틀의 박음질은 기본적으로 구조가 다르다. 손바느질은 바늘의 뒤 꽁무니에 실을 꿰어 보통 한 종류의 실로 바늘땀을 만든다. 반면 재봉틀은 바늘 앞쪽에 귀가 달려 있고 윗실과 밑실이 따로 있어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구멍을 뚫는 순간 두 개의 실이 서로 맞물리면서 매듭을 만든다.
김보라의 작업은 재봉틀의 장치적 속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박음질은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요소이자 그림을 확장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때로는 윗실과 밑실의 힘의 균형이 깨져 실이 엉킨 채 길게 삐져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재봉 상태의 불량을 의미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길게 자라는 풀이나 나무의 뿌리를 떠올렸다. 실제로 초기 작업에서 나무는 중요한 모티프였다. 우리는 땅 위로 솟은 윗부분만 보지만 나무의 생명력은 눈에 보이지 않은 뿌리에 달려 있다. 그는 작업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기도 했다.
때로는 실패한 작업을 오려내어 물감을 묻히고 찍어 독특한 질감을 흔적으로 표현한다. 재봉틀에 실을 꿰지 않고 페달을 밟아 구멍이 숭숭 난 곳에 물감을 칠해 배어 나오는 효과를 화면에 담아내기도 한다. 또한 박음질한 한지의 표면에 물감을 칠하고 문질러 잘 아문 상처처럼 한 덩어리가 된 두툼한 표면을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변주하고 변화하는 그의 작업에서 중심이 되는 원리는 바로 접촉과 상호작용이다.
최근에는 작업에서 자연 풍경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어 '싹', '새벽안개', 또는 이번 전시 제목에 영감을 준 '저녁노을'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자연의 정취를 개인적인 감수성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이러한 풍경은 그 자체로 특별한 기운을 가진다. 마주하는 순간 어떤 황홀경에 빠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작가가 작업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연과 교감하는 순간이다 자연 속 체험은 몸의 다양한 감각을 일깨우는데 이런 경험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김보라는 한동안 작업이 풀리지 않을 때 '바깥미술전'에 참여하면서 활력이 생겼다고 했다. 따뜻한 실내, 쾌적한 조건 등 편안한 작업 환경을 마다하고 자연 미술을 하는 작가들은 해마다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서도 야외 작업을 한다.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작업을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자연과 교감하는 희열과 생명력이다.
박음질읜 묘미는 감싸 안는 행위에 있다. 회화가 단면 위에 덧발라지는 작업이라면 박음질은 바늘과 실로 꿰매면서 종이의 위아래를 껴안는다. 종이와 물감, 실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탕재로 천을 사용했지만, 작업 초기를 제외하고 한지에 작업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항상 깨끗하게 빨아놓은 보송보송한 이불을 떠올렸다. 햇살의 기운을 가득 머금고 포근하게 감싸는 이불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김보라의 작업은 서로 다른 존재의 공존과 상호의존성, 돌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실 박음질하는 과정은 그리 평온하지 않다. 재봉틀이 박음질하는 동안 꽤 큰 소음을 유발하며 기존 회화의 틀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허물어진 자리 위에 새로운 연결망이 생겨나고 특별한 기운과 움직임이 생성한다 상처는 웅덩이처럼 깊이 패였지만 물을 담으면 호수가 되고 강물이 되어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장소가 된다.
작가는 시적 감수성으로 작업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재봉틀 소리에서 소나기 같은 세찬 빗소리를 떠올리거나 재봉을 땅을 비옥하게 개간하는 반복적인 삽질과 연둣빛 생명을 틔우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박음질이 나아가며 그림이 뒤로 밀리는 움직임에서 뒤로 가는 풍경을 착안하거나 시간을 거슬러 과거와 만나는 상상을 펼치기도 한다.
김보라 매번 개인전마다 새로운 인식과 작업의 의미를 담아 더욱 풍부한 흐름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는 더욱 간결해졌고 평면 작업에 오브제가 덧붙여지는 새로운 변화가 눈에 띈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서 얽히고 설킨 두터운 겹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자체로 생동한다.
이슬비. 미술평론가